설화를 참조해보면 진평왕 당시까지 전해오던 민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설화의 전개상 서동요는 빼어버릴 수 없을 만큼 서사구조에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다. 그렇다고 서동설화가 생기면서 이 노래가 같이 이루어 졌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서동요 자체가 배경설화 속의 서동과 선화공주의
공주를 연모하여 감자 캐는 아이로 변장하여 신라에 잠입, 이 노래를 아이들에게 퍼뜨려, 부모의 질책을 받고 쫓겨난 공주를 아내로 맞게 되었으며, 그 후 서동은 자라서 백제 무왕이 되었다고 한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고대인들의 강한 정열과 순진하고 소박한 노래로서 고대 동요(童謠)의 전형적
공주님은
남 몰래 사귀어(통정하여) 두고
맛둥[薯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2. 서동요의 작품이해
서동요(薯童謠)
신라 진평왕 때 백제 무왕(武王)이 지은 4구체 형식의 향가이다. 향찰(鄕札)로 표기된 민요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노래는 무왕조에 수록되어 있는 서동설화(薯童說話)에 끼
진평왕의 제 삼 공주인 선화가 재색이 무쌍하다는 소문을 그가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로 와서 아이들에게 감자를 주어 어울리면서 낮이 익어진 뒤에는 스스로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였다. 이 노래가 삽시간에 서울에 펴져서 대궐에까지 들어갔다. 대신들은 왕께 극히 간하여
설화로 파악하여 백제가 망할 무렵 왕실의 원찰이었던 미륵사를 보호하기 위하여 백제와 신라가 과거부터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기록 그대로를 신빙한다면 「서동요」는 6세기경의 노래이다. 그러나 이 사실만 가지고서 향가의 성립을 6세기경으로 판단하면
공주님의 은밀한 사랑
② 선화공주에 대한 연모의 정
5. 종류
4구체(전래되어 온 민요가 정착됨)
6. 의의
① 현전하는 가장 오래 된 향가 작품이다.
② 민요가 4구체 향가로 정착한 유일한 노래이다.
③ 향가 중 유일한 동요(童謠)이다.
④ 서동 설화가 노래의 배경설화가 되고 있다.
7. 구성
제1
, 마를 담는 바구니의 일종으로 해석한다. 일상적 여성의 생활 공간일 수 있는 마 퉁방이 여성의 은밀한 성적 유희의 장소로서도 파악되어질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보였다. 더구나 당시 신라와 백제의 관계로 보아 통혼이 있을 수 없었으리라는 점도 이 작품을 민요로 보게 만드는 이유이다.
공주는 편지를 쓰고 금을 법사에게 가져다 주었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에 신라 궁중으로 실어다 놓았다. 진평왕이 그 신통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고 항상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고, 서동은 이로 인해서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루는 무왕이 부인과 사자사에 가려고 용
Ⅰ. 서 론
백제의 서동(薯童)이 신라 제26대 진평왕때 지었다는 민요 형식의 노래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4구체향가이다. 이두(吏讀)로 표기된 원문과 함께 그 설화(說話)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무왕조(武王條)에 실려 전한다. 그 내용은 무왕이 어릴 때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가
노래를 부른 것이므로 어느 정도의 주술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선화공주의 은밀한 사랑이야기지만 이면적으로는 선화공주에 대한 서동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서동이 이 노래를 만든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신분은 백제시민이고 선화공주의 신분은 신라공주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